한반도 평화와 성평등 민주주의의 후퇴를 염려한다
지금 우리 여성들은 한반도 평화와 성평등의 후퇴를 크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통령선거를 둘러싼 공약의 남발과 공방전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힘겹게 지켜온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한반도 평화를 앞당기고 민주주의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해 온 우리는 민주공화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을 시민들께 전하고자 합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지난 1월 17일 북한이 탄도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 2발을 발사하자, 킬 체인이라 불리는 선제타격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발언하였습니다. 그는 “평화는 구호로 이뤄지지 않는다. 평화는 압도적 힘의 결과”라고 말하면서, “강력한 대북 억지력만이 대한민국의 평화를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2월3일 열린 방송 3사 합동 초청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북한에서 수도권을 겨냥할 경우 고각으로 (미사일을) 발사하는 경우가 많아서 당연히 (사드가) 수도권에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사드 추가배치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이같은 발언은 비핵화와 평화 안정을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정면으로 무시할 뿐 아니라 수도권 주민을 비롯한 국민 전체의 안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동북아 전체의 정세를 뒤흔들고 평화를 위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만한 언사를 사려 없이 내뱉고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발행한 <2016년 국방백서>에서도 당장 단거리 미사일 대응이 시급한 터에 중장거리 요격미사일 도입은 현실성이 의문시된다고 밝힌 대로, 사드라는 고고도(高高度) 미사일의 추가배치는 그 필요성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습니다. 사드 추가 배치 발상은 매우 위험합니다. 북한은 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 체제가 강화될수록 핵과 미사일 증강으로 맞서왔습니다. 이미 사드가 배치된 성주 소성리 주민들은 고통스러운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드 추가배치 주장이 나온 후 충남과 강원도 주민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사드가 배치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퍼지고 있습니다. 이는 책임 있는 정치지도자가 할 말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제를 강조하는 이재명 후보와 안철수 후보도 이러한 방안이 안보와 국익에 진정으로 기여할지에 대해 재고하기를 바랍니다.
대다수 국가의 군사전략에서 일촉즉발의 선제타격 가능성에 맞서 확고한 대응 태세를 갖추는 것은 일반적이고, 한국에서도 대북 억지력을 유지하는 것은 국방의 기본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간 선제타격 강조는 상대를 자극하여 우발적인 핵전쟁의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에 우리들은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남한이나 미국의 선제타격 징후가 포착되면 북한은 미사일을 즉각적으로 발사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출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북한의 미사일이 액체연료와 고정식 발사대에서 고체연료와 이동식 발사대 기술로 빠른 속도로 발전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선제타격의 효과성은 극히 낮습니다. 효과는 없이 무력 충돌만 야기되었을 때 그 후 벌어질 일을 누가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간 국제사회의 여러 노력들이 보여주듯이, 위기관리와 군비경쟁 억제를 통한 ‘전략적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방안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접근은 박정희 대통령의 7.4 공동성명, 노태우 대통령의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 노무현 대통령의 10.4 공동선언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의 판문점선언에 이르기까지 보수와 진보 정부를 넘어 우리 현대사 속에서 국민의 지지와 함께 착실히 뿌리를 내려왔습니다. 우리들은 한반도 평화의 위기 상황을 이용해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지도자를 원치 않습니다. 우리들은 평화와 평등의 민주주의 정치를 원합니다. 갈등과 혐오가 아니라 돌봄과 상생, 그리고 통합의 리더십을 원합니다.
또한 우리 사회의 여성들은 성평등 문제가 심각하게 정치화되어 여성혐오가 조장되고 남녀 갈라치기가 난무하는 현실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성격차 지수가 153개국 중 108위 그리고 성별임금 격차가 32.5%(2019)로 OECD 최하위인 국가입니다. 코로나 위기 가중으로 인해 우선 해고 등 구조적 성차별이 심화되는 것 또한 여성들이 직면한 현실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1월 7일 페이스북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를 올렸습니다. 성평등에 반대하는 일부 세력은 사려 깊지 못한 이 일곱 글자에 환호성을 올리고 있을 뿐 이에 대한 후속 논의나 대안 제시의 노력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여성에 대한 구조적인 차별은 끝났다”는 주장만 내놓은 채 남녀 고용차별과 임금격차 문제에도, 디지털 성폭력 문제에도 눈 감고 있습니다. 이 같은 무분별한 주장이 약자에 대한 집단 괴롭힘과 다를 바가 무엇인지, 그것이 대선후보로서 진정으로 할 일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간 꾸준히 이어온 성평등 정책의 심각한 후퇴를 초래할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을 손상시키는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국제사회에서 민주주의 성취의 모범적 사례로 호평받아 온 대한민국에서 반페미니즘이 증가하는 놀라운 기류에 해외 언론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성가족부 폐지는 1995년 <세계여성행동강령>을 통해 ‘적절한 예산과 인력을 보장받는 여성 정책 전담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UN의 정책에도 위배됩니다.
정무2장관실과 여성특별위원회를 거쳐 2000년에 여성부가 출범하였습니다. 각 부처에서 성평등 업무가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한계 때문에 여성계의 적극적인 요구와 지원을 통해 출범하였습니다. 적은 인력과 부족한 예산에도 불구하고 모성보호 3법 도입, 남녀고용평등법의 보완, 성매매방지법, 호주제 폐지 등과 같은 중요한 성과를 내어 여성인권 개선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지금도 한부모가족 지원, 아이돌보미 사업, 양육비 이행강제 등의 사업 외에도 학교 밖 청소년을 지원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날로 심해지는 불법 촬영물과 더불어 횡행하는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대응 역시 여성가족부의 고유하고 주요한 역할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여성가족부가 더 많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온 역사적 노력과 성과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릴 현실이 두렵습니다. 20-30대 청년들의 좌절과 분노는 주거와 자산의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입니다. 이런 현실에 맞서 교육구조와 노동시장 관리에 실패한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시급히 요청되지만, 할당제와 같은 제도를 공공연히 거론하며 여성이나 여성가족부에서 그 원인을 찾는 사실 왜곡이 일어나는 현실은 정말 슬픕니다. 지엽적인 사실이나 가짜뉴스를 악용하는 분열의 정치도 두렵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평화롭고 성평등한 사회로의 과감한 전환에 달려있습니다. 성평등 사회를 염원하고 한국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염원하는 여성들 그리고 시민 여러분! 지금의 위기 상황에 대응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는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참여의 방식으로 함께 행동합시다! 동시에 아래와 같은 요구를 알립시다!
- 각 당의 대선후보는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공약을 폐기하고 평화로운 한반도와 한국 사회를 위한 정책을 내놓으십시오!
- 윤석열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 주장을 철회하고, 각 당의 대선후보는 성평등 정책의 실제적 확장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나아가 성평등 정책의 적극적인 추진을 약속하십시오!
- 정치인들은 젠더 문제를 정치 도구화하는 행동을 당장 중지하십시오!
2022년 2월 10일
한반도 평화와 성평등 민주주의 후퇴를 염려하는
여성연구자와 활동가 220명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