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와 성평등 민주주의의 후퇴를 염려하는 여성연구자와 활동가 기자회견”(2021년 2월 10일), 한정숙 이사장 발언문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많이 포근해졌습니다만 쌀쌀한 기운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겨울날입니다. 여러분께서 오전 일찍부터 자리를 함께 해 주신 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는 세대를 망라하여 모인 대한민국의 여성 시민, 연구자, 활동가들로서, 최근 한반도와 동북아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의 진전을 위협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성평등 민주주의를 향한 노력을 심각하게 훼방하면서 여성혐오를 부추기고 있는 사회 일각의 분위기와 일부 정치권의 동향에 깊은 우려를 느껴 이에 대한 저희의 입장을 표명하고자 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교수 한정숙입니다.
제가 평화의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고 동료께서 성평등 민주주의 후퇴와 관련된 여성들의 입장을 말씀드리겠고 이어서 성명서를 낭독하는 순서로 오늘의 모임을 진행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 간단히 저희 입장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사드의 추가배치론과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론이 나왔습니다. 사드배치 문제로 대한민국 전체가 격심한 갈등에 휩싸였고 사드 배치지역의 주민들께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입니다. 그 기억은 우리 머리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결국 사드의 배치가 강행되었고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그 여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갈등이나 대외관계 악화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유력 대선후보가 사드의 추가배치까지 거론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론까지 나오니 듣기에도 놀랍고 충격적입니다. 내년 곧 2023년이면 휴전협정 체결 70주년이 됩니다. 우리 사회는 한반도에서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중단되어 있는 것일 뿐이니 이 불안정한 상황을 타파하고 온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선 전쟁의 종료를 선언해 보자, 그 바탕 위에서 항구적인 평화를 모색해 보자, 라는 바람으로 종전선언을 위한 운동을 최근까지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남북대화가 진전되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최근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졌고 이 틈을 타서 군비를 증강하고 과시하려는 움직임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북한도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미사일을 연이어 발사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크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위기를 가라앉히고 평화의 진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 지도자의 임무일 것입니다. 대선후보들은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담대한 구상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구상과 전망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상대방의 격노를 일부러 불러일으키려는 듯이 유력대선후보가 선제타격론을 내놓았습니다. 선제타격을 하고 나면 그 결과를 누가 어떻게 책임지겠습니까. 정치지도자, 통치자들이 생각 없이 호전적인 언사를 내뱉고 덤벼봐 하는 식으로 상대를 도발하는 일이 쌓이다 실제 전쟁으로 이어진 경우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자주 보아왔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그 가장 대표적인 예입니다. 정치인들이 사려 없이 내뱉던 말들이 그 후 인류를 얼마나 심한 고통과 참화로 몰아넣었던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생각 없는 지도자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투인력들도 물론 최전선에서 고통을 받습니다만 역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여성과 어린이 노인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한국 여성들이 일본군의 성폭력으로 인해 얼마나 끔찍한 경험을 했던가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생생하게 증언하고 계시거니와 우리 사회는 지금도 이 문제와 대결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국제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내전, 전쟁 상황에서도 여성들은 전쟁에 대한 책임은 없이 그로 인한 고통만을 온몸으로 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을 생각했을 때 여성들로서는 전쟁불사론이나 마찬가지인 선제타격론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성들이 전쟁의 희생자가 될 것이 아니라 평화의 견인자, 평화의 수립자가 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전쟁을 하는 데는 사실 용기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무모함과 공격성, 호전성을 가지고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화를 수립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평화는 세상과 나와 타자에 대한 성찰과 윤리적 태도를 가져야 수립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진정한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저희는 이 상황에서 저희가 낼 수 있는 모든 용기를 모아서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저희가 낸 용기와 간절한 염원이 사회에 전달되고 한반도 전체와 동북아 나아가 전 세계에 평화를 위한 분위기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계신 언론인들께 부탁드립니다. 우선 겨울 아침에 이렇게 나와 주신 것에 깊이 감사드리고요.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조장하는 무책임한 언행들만 부풀려서 전하지 마시고, 여기 여성들이 평화와 성평등 민주주의, 모두에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도 꼭 전해 주십시오. 젊은 여성들이 실존의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공포 분위기 속에서 삶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세계의 칭송을 받는 대한민국에서 이게 무슨 일입니까. 지금 선진적인 사회 어디에서 이러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물론 저희도 유튜브라든가 기타 동영상을 통해 저희 목소리를 전할 수도 있습니다만 공식 언론을 통해 저희 발언을 전달하는 것과는 사회적 파급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참다못해 나왔다는 것을 알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