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성평등 삭제하고 ‘살만하지 않은 사회’를 공고하게 만드는
저출산 정책 전면 철회하라
- 윤석열 정부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과제 및 추진 방향 발표에 부쳐 -
지난 3월 28일, 이번 정부 들어 처음 열린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고위)에서 윤석열 정부의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과제 및 추진 방향이 발표되었다.
이번 발표안은 지난 2020년 발표된 5개년 계획인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기본계획(이하 4차 계획)의 ‘모든 세대가 함께 행복한 지속 가능 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전면 부정했다. 특히, 4차 계획에서 근본적으로 구조에 개입하는 해결책으로서 전향적으로 제시되었던 ‘개인의 삶의 질 제고’ 등 목표를 “추상적이고 불명확한 목표”라고 평가하면서, ‘결혼·출산·양육이 행복한 선택이 될 수 있는 사회환경 조성’을 위한 ‘선택과 집중’을 추진 전략으로 내세웠다. 이는 현상에 대한 미시적 접근에 국한한 구시대의 정책 관점으로 회귀한 것이다. 인구문제 대책으로서 결혼·출산·양육에 집중하는 관점은, 출산의 주체인 가임기 여성을 문제의 주요 원인이자 정책의 관리대상으로 주목한다는 점에서 해롭다.
이번 발표안의 기본 관점을 살펴보면, 현실 진단과 정책 과제 설정에서 성인지의식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음이 개탄스러운 수준이다. 4차 계획의 3대 목표 가운데 ‘성평등하고 공정한 사회’가 포함되어 있던 것과 비교하면 명백한 퇴행이다. 세부 정책 과제 전반을 살펴보아도 4차 계획에 포함되어 있던 여성에게 부과된 돌봄 책임 완화, 성평등한 일터 조성, 포괄적인 성·재생산권 보장, 젠더폭력 피해 구제와 예방 등의 성평등 제고를 위한 목표와 추진 과제가 완전히 소거되었다. 이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정책 언어에서 ‘성평등’, ‘여성’을 끊임없이 삭제하고 있는 기조와 맞물리는 것이다.
이번 발표안에서 돌봄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하고 공적 돌봄체계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적극적 대책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특히, 돌봄노동자의 열악한 고용 지위와 노동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돌봄 수요자에게 서비스 이용 수당을 더 지원하더라도, 돌봄노동자의 지위가 불안한 상황에서 돌봄 공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당면한 문제를 회피한 채 기술 개발을 통해 돌봄 서비스를 고도화하고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은, 돌봄 현장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돌봄의 시장화를 가속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자녀 가구 직접 지원만을 확대하는 대책은 결국 양육의 책임과 비용을 가정에 전가한다. 여성을 돌봄의 주 담당자로 상정하는 사회 인식과 구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가정에 부과된 양육 책임은 여성 노동자를 일과 돌봄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이러한 성별 분업구조에 대한 시정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출산·육아휴직을 쓸 수 있도록 기업을 단속하고 육아기 단축 근로 및 유연 근무를 활성화하는 양육 지원 대책은 오히려 여성 노동자에 대한 낙인을 강화하여 기업이 지금보다 더 완강하게 여성 채용을 기피하게 만드는 효과를 낼 것이 분명하다. 주 69시간제 등 노동자에게 지금보다 더 장시간 노동할 것을 요구하는 정권 아래서 어떤 노동자가 혼자서 단축 근로나 유연 근무를 활용하겠다고 나설 수 있겠는가.
저출산 대책이 노동 정책과 분리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발표안은 ‘성차별 없는 노동권’을 위한 4차 계획의 방향을 전면 부정, 삭제했다. 저출산 대책은 성차별적이고, 불안정한 노동환경으로 내몰리고 있는 여성 노동자의 현실을 개선해야만 풀어낼 수 있다. 또 근로기준법과 사회 보장의 사각지대로 내몰리고 있는 비정형노동에 대한 협소한 대책 역시 문제다.
‘선택과 집중’을 통해 추진하겠다고 밝힌 5대 핵심분야 정책에는 그에 상응하는 예산이 배정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초등늘봄학교에 대한 2023년 국고지원 예산은 0원이다. 신혼부부와 유자녀 가구에 대한 공공임대주택 관련 혜택을 제시하고 있지만, 2023년 공공임대주택 예산은 무려 5조 7천억 원이 삭감되었다. 추진 기반이 전혀 마련되지 않은 모순적이고 공허한 대책이다. ‘사각지대·격차 해소’를 목표로 내세운 정책 역시 기존 4차 계획 이상으로 진전된 사항은 없으며 오히려 기존 계획을 축소하기도 했다.
저출산 대책으로서 '임신 준비 남녀'의 사전 건강관리 사업을 신설하고 '부인과 초음파, 난소 기능검사, 정액검사' 비용을 지원하겠다는 정책도 제시됐다. 이는 기존 4차 계획에 있던 생애 전반의 포괄적인 성·재생산 권리와 건강을 증진하겠다는 목표는 사라진 채, 임신·출산의 직접적인 수단으로서의 신체기능만을 '관리'하겠다는 취지의 정책이다.
한국 사회 노인 빈곤율이 38%가 넘는 가운데 여성 노인 인구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고(2020년 고령 인구 성비 76.2) 여성 노인의 기대여명이 높다. 그러나 여성 노인의 빈곤과 건강 문제에 대한 성인지 관점의 대책도 전무하다. 여성 노인의 공적연금 수급률은 남성의 절반에 불과하고(2019년 기준 남성 71.0, 여성 35.9%), 노동 참여율도 남성에 비해 낮으며 고용 지위도 열악하여 계속고용제도 등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현실에 대한 고려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한국 사회 인구문제의 근본 원인은 ‘이 사회가 살만하지 않은, 그리고 누구도 새로 태어나 살게 하고 싶지 않은 사회라는 절망적 인식’이다. 주 69시간의 과로에 시달리며, 불평등하게 부과된 돌봄 책임 때문에 일을 포기해야 하고,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기 어렵고, 혐오와 폭력이 만연해 아무것도 누구도 신뢰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들은 생존과 다른 모든 가치를 맞바꿀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회 부정의의 근간에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성차별이 있다. 인구문제는 젠더 문제이며, 해법은 성평등이다. 윤석열 정부는 퇴행적이고 모욕적인 결혼·출산·육아 장려 중심의 저츨산고령사회 정책 계획을 철회하고, 현실에 부합하는 대책을 제시하라.
2023년 3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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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주여성민우회 / 춘천여성민우회 / 파주여성민우회 / 평화를만드는여성회 / 한국노동조합총연맹 / 한국성폭력상담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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